쿠이 료코는 동인 활동을 하다 2011년 단편집 "용의 학교는 산 위"를 출간하며 데뷔했다. 그 뒤로 이어서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서랍 속 테라리움" 총 3권의 단편집을 냈으며 2014년부터 현재까지는 장편인 "던전밥" 을 연재하고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에서 우열이란 것을 가리기는 쉽지가 않다. 특히 "완성도"와 "선호도"의 문제가 끼어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즉 "잘 만든 작품인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완성도는 별로지만 나는 마음에 들었다" 와 같이 평가는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각종 미묘한 요소들과 평가라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문제을 모두 생각한다고 해도, 나에게 현재 활동 중인 만화가 중 종합적으로 "최고의 만화가" 를 골라 달라고 하면 나는 주저없이 쿠이 료코를 꼽을 것이다.

"어째서 쿠이 료코가 최고의 만화가인가"를 쉽고 짧은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보려고 한다.

 

창작욕은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에서 나온다. 창작자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소재나 구성, 이야기 구조, 캐릭터의 성격 등을 가지고 만든다고 해도 좋은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있으나, 그런 사람이 해당 조건에서 꾸준히 좋은 작품을 내놓을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작가가 원하는 전개를 위해 작가 본인도 모르게, 또는 작가 본인이 알면서도 좋아하는 소재를 사용하느라/좋아하는 이야기 구성을 만드느라 작품의 완성도를 해치는 경우, 즉 사랑과 열정이 작품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흔하다. 이는 만화가들의 생각 방식이 어느 정도 유사한 데에서 오는데, 대부분의 만화가는 "특정한 장면" 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며, 한 번 그 장면에 정신을 팔리게 되면 만화의 나머지 부분은 그 "특정 장면" 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 버리는 일이 많은 것.

이러한 작업 방식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작가의 열정은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가의 열정과 욕망은 작품에 광기와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모든 연출을 작위적이고 개연성 없는 장면이 나열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작가 자신이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서도 작품의 분위기가 갈린다. 작가 자신이 가진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이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어떻게든 작품 내에서 합리화를 하려고 애쓸 것인가?

아무튼 작가도 인간이기에 이러한 욕망, 부끄러움, 광기와 고뇌, 열정의 부재 등이 작품의 흐름과 이야기의 템포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쿠이 료코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연출, 컷 배분, 그림이 묘사된 정도,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들 등 만화를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 즉 작가들이 조금씩 인간미를 드러내는 세세한 부분들이 섬뜩하리만큼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자신을 드러내는 지점은 "테마"에 대한 선호, 만화를 메타적으로 분석해 나갈 때 평론가들이 느끼고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만화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된다.

겨우 그것 가지고 최고의 만화가라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까지 "작가" 자신을 멸균한 만화를 쿠이 료코만큼 꾸준하게 재밌게 그려내는 사람은 내가 아는 만화가들 중에서는 없다.

 

작가의 강한 자의식(자각, Self-awareness)은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지만, 반대로 자신의 열정과 애정을 의심하게 하고 자신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독이 된다.

창작자는 자신의 열정과 자신의 자의식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타기를 해야만 하며, 쿠이 료코는 현재 활동하는 만화가들 중 이러한 일을 가장 완벽에 가깝게 해 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최고의 만화가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그녀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모두 정식으로 출간되었고,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되었던 다른 좋은 단편집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언젠가 절판되어 구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단편집들만이라도 전부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본 리뷰에는 켄터키 루트 제로의 액트 V까지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켄터키 루트 제로 (Kentucky Route Zero) 는 어드벤처 게임이다. 이름을 그대로 번역하면 "켄터키 주 0번 국도" 가 된다. 이 게임은 일반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기묘한 "0번 국도(제로)"와 그 곳의 주민들, 그리고 여러 우연으로 만나게 된 다양한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로 켄터키의 국도는 1번부터 시작하며, 0번 국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목부터 이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인 "대체로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느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게임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몇 개 예시로 들면 다음과 같다.

 

"잘 나오지 않는 TV를 고쳐서 헛간을 보니, 마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것 같은 0번 국도의 입구가 열린다."

"작품에 등장하는 집과 패션, 자동차 등은 60~80년대를 떠올리게 하지만, 완벽하게 인간과 같은 로봇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거주 공간 박물관"에 전시된 집에는 아직까지도 사람이 살고 있다. 밤에는 거대한 독수리가 이 집들을 숲으로 옮겨준다."

 

예시로 든 장면 자체만으로는 다른 SF소설 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바로 등장인물 중 누구도 이러한 모든 일들을 "정말 이상하다", "말도 안 된다" 라는 태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러한 초현실적인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연출은 마치 플레이어가 누군가가 꾸고 있는 꿈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있는 듯한 효과를 준다. Dream Logic이라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꿈 속에서는 어떠한 위화감도 느낄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실제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던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고 본다. "대체로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꿈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간접적인 위화감과 친숙함의 공존으로 나타내지는 표면적인 층을 넘어서고 나면, 그 뒤에 보이는 인물들의 고뇌는 이러한 몽환적이고 애처로운 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섀넌의 부모님이 일하던 광산은 광부들이 자신의 월급으로 신선한 공기와 카나리아를 구입해야 했다. 수몰 사고로 광부들이 목숨을 잃은 이후 마을은 황량해지게 된다.

콘웨이는 다친 다리를 치료하려다 치료비로 다리를 저당잡히고, 우연히 방문한 "하드 타임즈" 위스키 공장 투어 비용으로 팔까지 저당잡힌다. (굳이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먼저 잃은 것으로 보면 "Costs an arm and a leg" 라는 표현과도 관련이 있으리라고 본다) 결국 이 빚으로 콘웨이는 "하드 타임즈" 위스키 공장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 동안 일하게 된다.

도널드는 나라에서 대학에 주는 지원금이 끊겨 평생을 바친 연구를 그만둬야 했다. 윌 역시 대학 지원금이 끊겨 연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 도널드는 "0번 국도"로 떠나 자신의 연구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나 결국 포기하고, 윌은 연구와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외에도 다른 인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안고 있는 후회와 회한들의 표현이 있으며, 그 후회의 많은 부분들은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패배한 데에서 온다. 켄터키 루트 제로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은 "인간이 아닌" 준버그와 조니, "성인이 아닌" 에즈라 뿐이다.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싸우지 않는 것 뿐이다. 도망치거나, 아니면 싸움을 인지하지도 못하거나.

 

준버그와 조니는 자신의 의무인 광산 청소를 피해 "도망쳤다".

에즈라는 아직 어리고 미숙하여 이러한 싸움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른다".

 

이러한 패배주의는 언뜻 보기에 나른하고 목가적으로 보여 아름다운 최종막, 액트5에서 더욱 강조된다. 마치 꿈과 같이 초현실적인 장면을 주로 보여준 액트 4까지의 모습과 달리, 액트 5의 배경인 마을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마을과 같다. 하지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일말의 불안감은 변함이 없다.

 

아름다운 장송곡을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등장인물들은, 외부와 이어지지 않은 마을에 몸을 맡기거나 다시 길을 떠난다. 이 작품의 흑막에 가깝게 묘사되는 전기 회사와 대결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러한 패배의 잔해를 몽환적인 꿈과 같은 형태로 바라보는, "도피"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켄터키 루트 제로의 주제라고 본다.

 

하지만 그러한 패배의식만이 전부는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슬픈 가사를 밝은 멜로디로 풀어나가는 컨트리 음악과 같이, 아니면 불행한 일을 겪은 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과 같이 "그래도 인생은 이어진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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